
(C) ecoticias.com
기후 변화로 인한 대형 산불 위협이 전 세계적인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유럽 피레네 산맥에서 전통적인 목축 방식을 현대적 기술로 재해석해 산불을 예방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환경 목축(Pastoreo Ambiental)’을 통한 생태계 복원과 방화선 구축 사업이다.
나바라 공립대학교(UPNA)가 주도하는 ‘파스토랄리(Pastorali)’ 프로젝트는 2029년까지 약 200만 유로(한화 약 29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피레네 산맥의 식생을 관리하고 대형 산불 확산을 저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4차 산업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목축'을 통해 농촌 소멸과 환경 위기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사라진 가축, 거대한 '연료통'이 된 산맥
지난 수십 년간 피레네 지역의 가장 큰 변화는 '농촌 인구의 감소'였다. 과거 가축들이 풀을 뜯으며 자연스럽게 관리되던 초지와 탁 트인 공간들은 목축업이 쇠퇴하면서 관목과 잡초가 무성한 밀림으로 변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식생의 변화가 산불의 규모를 키우는 결정적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가축이라는 '천연 제초기'가 사라지자 산맥 전체에 가연성 바이오매스(식물 연료)가 축적되었고, 이는 기후 변화로 인한 고온 건조한 날씨와 만나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거대한 연료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산불 발생 시 불길을 막아줄 차단벽이 사라진 셈이다.
GPS와 가상 울타리, '데이터'로 움직이는 가축들
'파스토랄리' 프로젝트의 핵심은 전통 목축에 최첨단 ICT 기술을 입힌 것이다. 프로젝트팀은 가축들에게 GPS 추적 장치를 부착하고 '가상 울타리(Virtual Fencing)' 기술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목동은 물리적인 울타리를 설치하지 않고도 스마트 기기를 통해 가축들이 산불 위험이 높은 특정 구역의 식생을 집중적으로 섭취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과거에는 목동의 경험에만 의존했다면, 이제는 실시간 위성 데이터와 초지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가장 효율적인 방화선 구축 지점에 가축을 배치한다. 이러한 방식은 노동 강도를 획기적으로 낮추어 젊은 세대의 목축업 유입을 돕고, 생산성을 높여 농가 소득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4,711km²의 대장정, 61만 명의 안전을 책임지다
이번 프로젝트의 공간적 범위는 가히 압도적이다. 스페인, 프랑스, 안도라를 아우르는 총 4,711km²의 면적이 관리 대상이다. 이는 스페인의 일반적인 주(Province) 단위 여러 개를 합친 크기와 맞먹는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산불 위험 지대에 거주하는 약 61만 4,000명의 주민이 직접적인 안전 혜택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단순히 산불을 끄는 '사후 처방'에서 벗어나, 가축을 통해 산불이 번질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사전 예방'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 진화 비용 절감은 물론, 산림 자원 보호와 인명 피해 방지 측면에서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유럽 연합(EU)의 전폭적 지지... 국경 넘는 생태 협력
유럽연합은 이번 프로젝트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유럽지역개발기금(FEDER)을 통해 총예산의 65%를 지원한다. 특히 스페인-프랑스-안도라의 8개 기관이 참여하는 다국적 협력 체계는 환경 문제가 국경을 초월한 공동의 과제임을 시사한다.
EU 관계자는 "환경 목축은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고 탄소 흡수원인 산림을 보호하는 '기후 회복력'의 핵심 도구"라며 "피레네의 사례가 전 유럽 산악 지대의 표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래를 향한 진보,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혁신적"
결국 ‘파스토랄리’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간이 떠나고 관리가 멈춘 땅은 재앙의 근원이 되지만, 인간과 가축이 공생하는 땅은 안전한 삶의 터전이 된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관계자는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전통의 지혜를 현대의 과학으로 무장시켜 미래를 지키려는 것"이라며 "가장 효율적인 방재 기술은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가축들의 발걸음 속에 있을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기후 위기 시대, 피레네 산맥의 양 떼와 소 떼는 이제 단순한 가축을 넘어, 인류의 미래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새로운 행보를 시작하고 있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저작권자ⓒ 환경데일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